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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기획 | 이젠 '우리'로 살아요 

 

이주 여성’ 아닌 ‘이웃 여성’있는 대로만 봐주세요
레오빅, 정선종 부부의 제2의 고향 만들기



“아유, 다정이 엄마 착하지. 어디 그런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한국에 정착한 지 6년째. 한국어는 조금 서툴지만 늘 밝게 인사하는 레오빅(36)씨는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전북 김제로 시집왔을 때, 낯선 이곳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였다. 남편 정선종(51)씨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녀는 진심을 다해 마음으로 다가갔다. 한국에 오기 전,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배우자’ ‘어떤 일에도 감사하자’고 결심했다는 레오빅씨. 그녀와 남편 정선종씨는 난을 가꾸듯, 행복을 키워가고 있었다. 


취재, 사진 정하나


2003년에 결혼해 전북 김제에서 다정(6), 다산(5) 두 남매를 키우며 영어 교사로, 대학원생으로, 꿈을 가꿔가고 있는 레오빅씨와 남편 정선종씨 가족의 난초 향 같은 이야기.



말 없어도 느꼈던 치매 시어머니의 사랑





지나다 밭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 가던 길 멈추고 팔을 걷어붙였다. 경로당에서 설거지나 청소도 도왔다. 늘 한결같이 상냥히 인사하고 뭐든 배우려는 착한 그녀에게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멀리서 왔으니 뭘 알겠냐며 김치를 챙겨주고, 감자, 고구마 같은 것도 나누어주었다. 경로당에서 음식을 장만한 날에는 할머니들이 데리러 왔다. 애들 옷을 따로 챙겨놓기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이심전심, 눈빛만으로도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치매전문병원에 계셨던 시어머니를 먼저 모시자 한 사람은 바로 레오빅씨였다. 병원에서 처음 시어머니를 만난 순간, 어머니는 그녀를 껴안고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레오빅씨 또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다. 쇠약한 어머니를 집으로 다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온갖 수발을 들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던 그녀였다.


“엄마에게 감사했어요. 그 엄마 없으면 이렇게 좋은 남편 못 만났잖아요. 그냥 어머니 옆에만 있어도 알 것 같았어요. 제가 멀리 시집와서 힘들다는 것 잘 알고 계시구나, 대화가 안 돼도 그냥 어머니 사랑을 느꼈어요.” 서툴지만 한국어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는 레오빅씨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글썽였다. 2005년 어머니를 모신 지 몇 개월 후 세상을 떠나셨을 때 가장 슬피 울었던 이도 레오빅씨였다. 이런 그녀에게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 이는 남편이었다.

“아내가 정말 고생 많았어요. 제가 무뚝뚝해서 잘 표현은 못 하지만 항시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 하나 보고 왔는데 정말 잘해줘야겠다 하는 마음이 가슴에서 우러나왔어요.”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치매가 있는 어머니와 사는 정선종씨에게 한국에서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그때 필리핀에서 오래 거주하여 현지 여성과 결혼한 후배의 권유가 있었다. 필리핀으로 선을 보러 가서 만난 레오빅씨의 손을 잡고 정선종씨가 청혼했을 때 “마치 운명처럼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레오빅씨는 말한다.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축복에 감사해요



레오빅 큐 바스퀘즈(Leovic Q. Vasquez)씨는 1974년 필리핀 일로일로(Iloilo)에서 사탕수수와 벼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하고 활달했던 그녀는 그 지역의 명문으로 알려진 필리핀 중앙 대학교(CPU)의 장학생이었고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나라 문화나 해외에서 사는 데 대한 동경이 유난히 컸지만 한 번도 한국 남자와의 결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인 남자를 배우자감으로 소개했을 때 친정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하셨다.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오빅은 언제나 동생들을 잘 보살펴온 든든한 딸이었다. 정선종씨는 한 달 동안 예비 아내의 일가친척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니고 나서야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가족을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떠난 그녀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2004년 7월.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모든 것이 다른 곳에서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굳게 결심했던 것이 있었다. “마음을 열고 이곳의 방식을 배우자 다짐했어요. 또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내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자는 것이었어요.”


남편은 그런 그녀의 불안을 헤아렸고 태산처럼 든든한 힘이 돼주었다. 정선종씨는 ‘이주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드러냈다. 모임에도 항상 동반했고, 또 한국인 아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국어와 문화는 물론, 아내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게 지원해주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남편 정선종씨의 권유였다. 재능도 있고, 무엇보다 아내가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올 때 아내를 꼭 행복하게 해줘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내가 눈에서 눈물은 안 흘리게 하겠다’ 약속했어요. 근데 눈물이 많아 계속 흘리니까 당황되죠.”(웃음)


정선종씨는 아내가 한국어를 잘하도록 한국어 교사를 자처했다. “이주여성이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저녁이면 그는 영한사전을 펼쳐놓고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대화를 했다. 바르게 발음할 때까지 몇 백 번이고 반복을 하게 했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남편을 볼 때 그녀는 따스한 남편의 사랑을 느낀단다.




다문화가정 남편, 아내 문화 배워야


 

 



이들 부부가 살아가는 방법도 한국인 부부와 다르지 않다. 다른 차이를 수용하고 참고 기다리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긴다. 한국 남자는 왜 저럴까, 필리핀 여자는 왜 저럴까, 갈등이 생기려고 할 때마다 특효약은 참고, 이해하고, 먼저 사과하는 것이었다고 정선종씨는 말한다. 또 살아온 관념과 관습을 버리고 새로이 상대의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정선종씨는 답답함을 느낄 때면 난실(蘭室)로 가곤 했다. 20여 년 전부터 키워온 5백여 개의 난초가 자라는 하우스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난초들이 저마다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정씨는 “결혼 생활에 난초 키운 덕을 봤다”고 한다.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 것. “제 성격이 원래 굉장히 불같아요. 근데 살려고 참았어요. 아내가 몰라서 그런다 싶으니까 모두 이해를 하게 됐죠.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한 번 참으니까 편해서 두 번 참고, 지금은 편한 맛에 그냥 참아져요.”(웃음)


그는 “가끔 남의 집 부부 싸움 얘기를 자세히 듣고 보면 한국 남편이 이해를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아내 나라의 문화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필리핀 문화에 배울 점이 참 많아요. 그러려면 편견이 없어야죠. 자기 생각을 버리고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이잖아요.”


정선종씨 스스로도 자신이 참 많이 바뀌었단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자라온 그는 아내가 외출하면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아내를 기다렸다. 가사일에 남녀 구분이 없는 필리핀 여성은 기겁할 일. 그런데 얼마 전 아내가 발을 다치고 나서부터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맡았다. 입원해 있던 한 달 동안, 아침 준비하고 아이들 챙기고 아내의 간병까지, 헌신하는 그를 보며 주위 할머니들은 “남편 잘 만났다고, 한국 남편 그런 거 없다”며 칭찬을 해 아내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밝은 성격의 레오빅씨가 한국 문화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먹으라고 챙겨줄 때”라고 한다. 무척 심하게 아팠던 적도 있고, 고향 사람들과 음식이 절절하게 그리워 눈물지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에겐 든든한 ‘백’이 있었다.


남편의 여동생은 임신한 그녀를 위해 과일 한 박스와 다섯 벌의 겨울옷을 사주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노래, 음식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쳐주는 다문화 센터 사람들, 이사 온 지 2년째 된 이 동네에서도 대학원에 다닌다고 늦게 오는 날이면 언제나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웃 미용실 언니, 김치도 주고 늘 챙겨주시는 닭집 할머니,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말해주는 남편과 가족, 친구들…. “따스함 느낄 때마다 허전했던 것도 풀려요. 그 친절, 정말 새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우리 이주여성들도 같은 한국 사람처럼 대해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내 마음속에서 커가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니까요.” 

 

우리 이웃여성님들의 사연을 읽어보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우리보다 순수하고,
우리보다 오픈되어 있으며,
우리보다 더 정이 많은 것 같다..

이분들이 한국에 와서 상처받지 않기를.
우리도 그분들에게 오픈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나부터 변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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