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데에만 서로 나눌 희망이 있어요"

시대의 한가운데서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하다 작가 김홍신

1981년 한국 최초로 밀리언셀러가 탄생한다. 당 시대의 부정과 부조리를 속 시원히 파헤친 장편소설 <인간시장>. 소설은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고 사람들은 작가 김홍신을 이야기했다. 1996년 정치에 입문한 김홍신은 이후 8년간의 훌륭한 의정 활동으로 ‘1등 국회의원’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이야기꾼의 삶을 선택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언제나 행복과 희망을 나누고자 했던 사람 김홍신(64). 대학교수로, 강연가로, 작가로 여전히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나보았다.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 같으세요?”

“행복이 뭐냐면요, 진짜 깊은 행복은 즐거움이에요. 마음에서 오는 거죠. 행복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다 마음이라고는 대답해요. 근데 물어보니까 그렇게 대답하지, 내가 갖고 싶은 것, 지금 나한테 없는 어떤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행복할 길이 없어요.”


요즘 김홍신 작가에게 새로 붙은 별명은 ‘행복 전도사’라 한다. 각종 강연과 글을 통해 늘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그는 역시 행복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도 살아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한번 해보세요. 아침이 가벼워지고 즐거워져요. 그 즐거움이 행복이고, 이런 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맛있는 거 먹거나 좋은 영화 보면 주변 사람들한테 가보라고 권하듯이, 이게 나 혼자 느끼고 나만 행복할 게 아니라는 거죠. 같이 나눠야지요.”


그래서 더욱 강연을 다닌다 한다. 학교 외에도 한 해 평균 100여 회의 강연. 작년 여름에는 그중 반응이 좋았던 내용들을 모아 <인생사용설명서>라는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인생 사용 설명서’가 있다면 당연히 ‘울고불고 화내고 분노하라’고 적혀 있지는 않겠지요. ‘날마다 웃고 즐기며 행복하라’고 적혀 있을 거예요. 내 영혼을 위해서는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에 겨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힘들 때마다 내 ‘인생 사용 설명서’에 무엇이라 적혀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얼마 후 한 여성 독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아니스트이면서 교육계 종사하는 분인데, 버스에서 내리다가 그만 옷자락이 문틈에 낀 채로 끌려가서 오른손 손가락을 잃었대요. 그분이 제 책을 읽고 버스기사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더니 그 순간 너무 행복하고 평화롭더라고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천사를 만나셨군요. 용서한 순간이 천사예요’ 그랬지요. 사랑, 용서, 배려 이런 게 사람답게 사는 거죠.”


자신의 글을 읽고 어느 한 사람이 평화로워졌다는 사실, 그때의 출렁이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김홍신 작가. 그 역시 용서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 처절히 경험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 1997년이었다. 어머니 산소에 가던 중 아버지가 뺑소니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분노가 들끓었다. 그는 운전자를 만나면 어떻게 응징할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한다. 다음 날 경찰서에서 뺑소니 운전자를 만났다. 운전자는 공포에 질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운전자를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내가 도와줄 테니 떨지 마세요….”
그는 지금도 자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한다. 마치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아버지였다고 믿는다. 장례를 치르고 그는 담당 검사에게 운전자의 죄를 가볍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래야 아버지가 편히 저승으로 갈 것 같다고 애원했다.


“그때 저는 용서의 위대함을 배운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 옹졸한 가슴을 키워주려고 그렇게 시키셨던 거지요.”


“99% 내가 옳다고 생각한 걸 뉘우쳤어요”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용서할 줄 아는 따스하고 넓은 사람이 되려 했고, 정치인이 되어서도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천한 드문 선례를 남겼다.


“정치를 시작할 때 겁났죠. 내가 이걸 꼭 해야 되는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거 자칫 하면 내가 비판하던 그 속에서 비판받는 자가 되겠구나.” 그는 작가이자 시민운동권 출신으로서 최소한 부끄럽지는 말자 다짐했고, 소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15대 국회의원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회비 반납 운동.
국회의원 시작이 5월 30일. 30일과 31일 이틀 일했다고 한 달치 봉급을 주는 것에 대한 반대 운동이었다. 동료 의원들의 미움도 많이 받았지만 결국 의원세비를 날짜별로 계산토록 한 ‘국회의원 수당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16대 국회 제1호 법안으로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그가 주축이 되어 제정한 ‘국민기초 생활보장법’은 지금도 우리나라 사회복지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의 대변인으로서 권위는 지키되, 권세를 누리지 않겠다는 결심도 실행했다. 그는 한 번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았으며, 카펫 깔린 의원전용 현관문 대신 뒷문을 이용했고, 전용 사우나도 이용하지 않았다. 공적인 업무가 아니면 귀빈실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15대, 16대 국회의원으로서 8년 내내 한국유권자운동연합평가 의정 활동 1등 수상은 물론 여러 시민 단체와 각 언론으로부터도 의정평가 1위, 최우수 국회의원, 자랑스러운 정치인 등으로 선정된다. 대한민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데요, 그게 나 혼자 힘인 것처럼 말하면 안 돼요. 도와준 많은 분들이 있었어요. 국민들이 도와줬고, 시민운동 단체들, 문단의 선후배, 고향 친구들, 특히나 밤새고 고생한 우리 보좌관들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어요.”


당시 공직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국정감사 후 편지를 보내준 최초의 국회의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국정감사가 끝나면 공직자 전원에게 편지를 썼다. 그날 큰소리치고 뭘 지적하고 한 것은 국민의 대변인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지 사적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혹시 섭섭하셨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덮어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정치를 그만둔 직후에는 케이블TV를 통해 사과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내가 옳은 줄, 내가 진실한 줄, 내가 정의로운 줄, 내가 바른 줄만 알았던 것에 대해 사과했어요. 지나고 보니까 나만 옳은 게 아닌 거예요. 내가 51% 옳았으면 그쪽은 49% 옳은 게 있지 않았겠어요. 근데 마치 내가 99% 옳고 바르고 정의롭다고 생각한 걸 뉘우치게 되더라구요.”


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김홍신 작가. “상대 탓이라고 핑계를 대면 사는 데는 편할지 몰라요. 하지만 행복하진 않아요. 사과를 못 하는 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만심 때문이에요.”


거리를 오가다 보면 팬이라며 악수와 사인을 청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는 김홍신 작가. 그때마다 살얼음판 같았던 정치인 시절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았으면 이렇게 얼굴을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잘 가르쳐준 거죠. 항상 똑바로 살라고 하셨거든요.”


국민에게만 무릎 꿇겠다 결심
김홍신은 1947년 공주에서 1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논산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셨고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유복했지만, ‘외아들을 후레자식으로 키웠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아들을 엄격하게 가르치셨다. 집안 청소, 물 긷기, 장작 패기, 변소 청소, 장 보는 일까지도 맡겼다. 밥 먹다가 흘리면 주워서 씻어 먹으라 하셨고 아버지보다 먼저 수저를 들거나 밥상을 물리면 당장 회초리였다.


“어느 부모나 똑같겠지만 ‘똑바로 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지금도 어머니가 하늘에서 ‘난 앉아서 구만 리 본다, 똑바로 살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 없지만, 그나마 그 시절 언문을 떼고 셈을 할 줄 알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 몰래 야학당에 숨어들어 공부한 덕이라 하셨다. 어머니는 <춘향전>을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으셨다. 그는 훗날 <인간시장>을 쓰며 어머니가 닳도록 읽으셨던 고전들을 떠올렸다 한다. 주인공 ‘장총찬’을 현대판 암행어사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1981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간시장>은 단 일년 만에 백만 부가 팔리며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된다. 서슬 퍼런 계엄령 하, 작가들이 책을 쓰면 계엄사령부에서 미리 읽고 ‘검열필’ 도장을 찍어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군부정권에서 부패와 부조리를 파헤친다는 건 목숨을 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보호해준 건 국민들이었다. 암울하고 답답한 시절, 정의에 목말랐던 국민들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일갈하는 ‘장총찬’과 그를 창조한 작가 김홍신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인간시장>으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래서 그때 저한테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저도 나중에 국회에 들어갔을 때 더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 같애요. 너무 많은 빚을 졌으니까, 오로지 국민에게만 무릎 꿇을 것이다, 결심했었거든요.” <인간시장>은 그에게 명망과 성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의 아픔도 주었다. 당사자인 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정체 모를 이들의 협박과 공갈에 시달려야 했던 것.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피신까지 가야 했던 아내는 살얼음 걷듯 불안한 날들에 심장병을 얻었다. 그 후로도 큰 고통을 담대하게 잘 참아내던 아내는 결국 지병이 깊어지며 2004년 3월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는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선거 운동을 7일간 쉬었고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솔직히 그때는 떨어지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정치를 하면서도 늘 뭔가를 쓰고 싶은 욕망이 있었거든요.” 청와대에서 장관직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작가의 길을 선택한다. 정치를 그만둔 후 그가 가장 먼저 집필에 들어간 건 대하소설 <김홍신의 대발해>였다. 한창 정치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무렵, 법륜 스님이 “발해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민족사에 남는 일이며 정치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며 권했고, 그 역시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 차원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에 맞서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명상을 해야 나를 알게 됩니다”

8년 동안 자료 조사를 했다. 중국과 북한, 러시아, 사할린, 일본을 수없이 다녔고, 500여 권 책을 읽었다. 2005년 집필을 시작한 이후에는 하루 12시간씩 꼬박 책상에 앉았다. 사람도 안 만나고 햇빛도 안 본 채 2년 동안 쓰고 7개월 동안 수정해서, 써낸 것이 원고지 12,000매.


아직도 만년필로 원고를 쓰는 그는 결국 오른팔 마비와 햇빛 알러지, 요로결석이라는 병을 얻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손 마비가 와서 주사로 버티고, 팔을 움직이지 못해도 원고 쓰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한다. 그는 천상 글쟁이였던 것이다.

“작가의 소명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애요. 부조리나 정의롭지 못한 것, 국민을 아프게 하는 것, 비인간적 것, 이런 것들로부터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 또 희망을 함께 나누는 것, 이런 것들이 작가의 소명 중 하나인 것이지요.”


소명을 인식하는 진정한 통찰력과 지혜는 자기를 돌아볼 때 일깨워진다.
작가 뿐만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지녀야 할 삶의 의미이기에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이들에게 “나를 돌아보는 명상을 하라”고 강조한다. 서로 나눌 수 있는 희망의 확인, 이것이 이 시대 이야기꾼 김홍신의 희망이다.



작가 김 홍 신 님은 1947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논산에서 성장했습니다. 건국대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1976년 소설 <물살>로 작가 데뷔, 1981년 국내 최초로 백만 부를 돌파한 장편소설 <인간시장> 이후 <바람바람> <초한지(전7권)> <대발해(전10권)> 등의 소설과 산문집, 시집 등 120여 편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1996년 민주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1997년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 15대, 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8년간 의정 활동 1등 국회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현재 건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소설문학상, 통일문화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http://webzine.maum.org
월간 마음수련 2010년 3월호에서_

진정한 작가의, 진정한 정치가의 마음을 지니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예전 무릎팍도사에 나왔을 때도 참 존경스러운 분이시구나 했었는데, 이런 정신이 건강한 분들이 더 많은 글을 쓰시고, 더 많이 정치계에 나가면 좋을텐데..

국민에게만 무릎을 꿇겠다는 그마음가짐 말이다.. 그거 하나면 국민들한테 되지 않을까?

김홍신님의 홈페이지
젊으셨을땐 한 인물 하셨네..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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