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마음수련 2009년 10월호

 마음으로 만난 사람 | 슈퍼맨 닥터리 이승복박사 
 

"장애가 좌절한 이를 돕는 꿈을 갖게 했어요"
체조 선수에서 의사로, ‘슈퍼맨 닥터 리’
미국 존스 홉킨스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 이승복 박사

  

하게 좌절하고 낙담하는 환자들은 특히 힘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분도 꼭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도전 정신도 생겨요. 처음에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 또한 그와 똑같은 사람이고, 같은 환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요.”
미국 볼티모어에 위치한 존스 홉킨스 병원. 미국 내에서도 최고의 병원으로 꼽히는 이 병원의 재활병동에는 휠체어를 탄 채 종횡무진하는 한국인 의사가 있다. ‘슈퍼맨 닥터 리’라 불리는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 이승복 박사다.

글 이권자, 사진 김혜균



“정말 의사인가요?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었죠!”

“제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게 보이나요? 저는 체조 선수였어요. 한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연습하다가 부상을 당한 후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고개조차 흔들지 못했었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고, 지금 당신 앞에 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힘을 내세요.” 휠체어를 탄 의사의 말을 조용히 듣던 환자는 이내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으로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한다. 그는 이제 물리치료실로 가 재활 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혹은 어떤 병으로 인해 사지마비라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분노하거나 좌절한다. 어떠한 치료도 상담도 거부하며 화를 내거나, 차라리 이 끔찍한 삶을 끝내게 해달라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들의 심정을 잘 아는 닥터 리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희망을 갖는다. 닥터 리를 처음 본 순간 환자들은 “당신이 정말 의사요?” 하며 놀란다. 그리고 두 가지를 궁금해한다.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었죠?” “어쩌다 장애인이 된 거요?”라고.

1983년, 19세의 이승복은 올림픽 꿈나무들을 길러내는 미 동북부 지역 최고의 체조 훈련장, 앨런타운 파켓 국립 체조훈련센터에 있었다. 열두 살에 기계체조를 시작한 이후, 전국연합챔피언십 마루 1등, 도마 1등(종합 3위), 국제친선 주니어대회 종합 3위, 전미대회 마루 금메달, 도마 금메달(종합 3위) 등의 실력을 보인 그는 타고난 체조 선수였으며, 올림픽 예비군단이었다.

미시간대, UCLA, 펜실베니아 주립대, 스탠퍼드대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미래 또한 창창했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이 가깝게 느껴진 만큼 연습에 몰입했다. 하지만 아직 아라비안 살토(Arabian salto, 서머솔트 공중돌기를 일컫는 용어) 1과 3/4회전이 완벽하지 못했다.

7월 4일, 연습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면 1과 3/4회전을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회전을 시작했고 한순간 쿵! 하며 앞으로 떨어졌다. 잠시 까만 공간 속을 헤매던 그는 다시 연습을 하려 했다. 그런데 손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진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척수신경 C7-C8 종결. 의사는 목 아래로 사지마비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렸다.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죠. 그때는 사지마비가 된 것보다 다시는 체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절망했었습니다.” 체조를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떨어지고 다쳐도,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이것만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를 알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올림픽 금메달 대한민국의 이승복 선수! 태극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얼마나 상상했던가.



‘닥터’가 되어 한국 사람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승복 박사는 1965년 서울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약사였던 아버지는 1973년 미국 이민을 결정한다.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인 시대를 답답해했으며, 미국에서라면 더 나은 삶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엘리트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소득층 노동자가 되어 등이 휘도록 일만 해야 했다. 부모님의 빈자리는 승복이 채워야 했다. 그는 라면을 끓여 먹으며 동생들을 돌보았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것이다. “영어 못한다고 놀리고, 넌 왜 이렇게 코가 납작하고 키가 작냐고 놀리고. 또 넌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묻지,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게 저를 아주 화나게 한 것 같아요. 한국이란 나라를 전혀 모른다는 게 비참했어요.”

승복의 나이 아홉 살,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고 한다. 악착같이 공부했지만 그보다 뭔가 더 대단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던 1976년 YMCA회관에서 체조하는 아이들을 보고 신기했던 그는, 운명처럼 바로 다음 날 TV에서 올림픽 체조경기를 보게 된다.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2단 평행봉에서 10점 만점을 얻는 장면과 도마경기에서는 넬리 킴이라는 한국 소녀가 10점 만점을 맞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소녀의 가슴에는 소련 국기가 붙어 있었다. ‘저 소녀가 태극마크를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승복의 가슴엔 올림픽의 꿈이 밀려들었다. 이후로 다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 대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시민권도 받지 않는 그를 위해 코치들 역시 승복을 한국 대표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사고로 승복은 병원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일류 체조 선수였건만 그는 아기처럼 밥을 먹는 방법, 숟가락 쥐는 법, 물 마시는 법 등을 배워야 했다.

그는 물리치료 과정을 올림픽 훈련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재활치료, 3개월 후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었고, 4개월째에 이르자 가능한 근육들을 거의 쓸 수 있었다. 의사들은 이렇게 재활 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읽기와 글쓰기까지 가능해지자, 승복은 의학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앞으로 넘어지며 목을 다쳤을 뿐인데 왜 사지가 마비됐는지, 그는 자신의 몸이 궁금했다. 하지만 어려운 서적들은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조무사 한 명이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 를 권했다. 러스크 박사는 ‘재활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행해졌던 고통스런 재활훈련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재활의학이란 육체의 상처뿐 아니라 마음도 치료하며, 생명의 질을 향상시키는 학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나도 이런 환자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의사가 되고 싶다! 그것이 저의 두 번째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평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를 쓰고, 의무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는 의사들에게서 실망하고 있었던 것. 그는 자신은 ‘환자들이 원하는 따듯한 의사’가 되겠노라 마음먹는다. 

피하주사 실습 대상 되어준 어머니
의사가 되려면 먼저 의대에 가야 했다. 미국은 4년간의 학부 과정을 마친 후 의대에 지원할 수 있다. 의사가 되겠다면 학부 시절에는 보통 생물이나 화학 등 기초과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승복은 뉴욕대에 들어가 불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한다. 세계적인 병원에서 다양한 인종의 여러 환자들을 돌보려면 영어나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도 한다는 게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콜롬비아대학 공중보건대학원 석사를 거쳐 1993년 다트머스 의과대학 최초의 사지마비 장애인 학생이 된다. 무려 십 년 만에 꿈을 이룬 것. 하지만 200년 역사의 다트머스 대학에 장애인을 위한 설비는 없었다. 의대 내의 모든 실습장비, 의료장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한발 물러서서 친구들이 실습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학교 측에 시정을 요구하고, 싸우고, 기다리며 하나씩 해나갔다.

 

 남들이 4시간 할 공부를 8시간은 해야 했기에 그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휠체어야 앉아 책을 봤다. 주사를 놓는 연습을 하면서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피하주사를 연습할 때는 어머니가 기꺼이 엉덩이를 내놓고 아들의 실습 대상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정맥 주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호박, 토마토, 오렌지를 사다 놓고 점을 찍은 뒤, 그곳에 정확히 놓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그는 의대생이 배워야 할 모든 과정을 남들과 똑같이 아니 더 우수한 성적으로 끝냈다. 결국 다트머스 의대는 장애인 학생에게 최우수 졸업생이라는 영예를 준다.

“저한테는 제2의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힘들 때마다 태극마크를 떠올렸어요. 그래, 나는 자랑스러운 아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열심히 해야지, 난 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이어 하버드대학 병원에서의 인턴 과정을 시작하며 그는 드디어 빳빳한 명찰이 달린 흰색 의사 가운을 입게 된다. 명찰에는 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동료들은 그를 ‘슈퍼맨 닥터 리’라 불렀다.

“의대 다닐 때 친구들이 승복이란 이름의 에스비(SB)를 따서 슈퍼보이(Super Boy)라고 불렀는데, 의사가 됐으니까 이제 슈퍼맨이라면서 바꿔 부르더라구요.” 하버드대학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며 ‘올해의 인턴’으로 뽑힌 그의 다음 올림픽 코스는 존스 홉킨스 병원이었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수석 레지던트를 거쳐 현재 수석 전문의가 된 이승복 박사. 그를 만나려면 병원 입구에서 ‘슈퍼맨 닥터 리’를 만나러 왔다고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재활병동의 한 병실에서, 어느 환자의 친구가 되어 진심으로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닥터 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절대로 끝난 게 아닙니다. 당신을 도울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나라가 잘되는 일이라면! 가슴속의 태극마크

환자들은 닥터 리를 만난 것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당당하게 꿈을 이뤄낸 한 사람으로서, 그는 곧 자신들의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인턴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장애는 버거운 핸디캡이었어요.

남들은 계단으로 10초면 갈 거리를 5분이나 걸려 가야 하니까 정말 답답했죠. 내가 과연 의사를 할 수 있을까, 속이 상했는데, 존스 홉킨스에 와서부터 장애가 단점이 아니라 축복이 되었고, 10분이 아닌 5분이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의대생들과 전공의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미국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알려주고, 한국의 장애인 복지 발전에도 힘이 되고 싶다는 이승복 박사.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더욱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가슴속에는 열두 살 소년 시절 품었던 태극기가 아직도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미국의 어떤 유명한 병원보다 더 훌륭한 의사들이 한국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도 열심히, 금메달을 향한 질주를 계속할 겁니다.”

의사가 되었으니 이미 금메달의 목표는 이룬 것이 아닐까. “아직은 은메달인 것 같애요. 진정한 금메달은, 앞으로 50년, 100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50년, 100년 전에 휠체어 타고 다니던 어떤 의사 덕분이래’ 이렇게 말할 때가 진짜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겠지요.”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엔 꿈이 생긴다. 꿈은 목표를 만들고 도전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한계를 만드는 것도 자신이고, 한계를 없애는 것도 자신이다. 이승복 박사는 말한다. 기적도 한계도 당신 안에 있다고.

이 승 복 박사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12세에 기계체조를 시작한 후,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며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촉망받지만 1983년 연습 도중 불의의 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됩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제2의 올림픽에 도전하였고, 재활의학과 의사라는 꿈을 이룹니다. 현재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병동 수석 전문의로 근무 중인 그는 2006년 김양원씨와 결혼했으며, 저서로는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승복 (황금나침반,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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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로구나! 언제 한번 꼭 읽어봐야겠네요~

TV에서도 몇번 뵌적이 있는 분_ 이승복 박사님
정말 이런 분이 _스로 _리한자, 스승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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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마음수련 2009년 10월호
웹진 http://webzine.ma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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